[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야기(2)]
國父로 추대해야 하는 이유
이러한 과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국부로 받들어야 하는 당위성은 무엇인가?
그는 20세에 배재학당에 입학한 후 90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그의 머릿속에는 조국과 민족 밖에 없었다. 그는 지구상에서 사라졌던 조국을 찾아 나라를 세워 대통령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탁월한 선견지명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정부를 수립했다. 그리고 탱크 한 대 없는 남한을 러시아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북한이 탱크를 몰고 쳐들어왔을 때 미국과 유엔군을 끌어들여 물리쳐 공산주의 국가로 전락하는 위기를 막아냈다. 당시 미국이 볼 때 한국은 나라도 아니었고, 대통령도 헌병 몇 명 보내 체포해도 누가 뭐라고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군의 관할 하에 있는 포로수용소의 반공 포로를 석방하여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미군을 주둔 시켰다. 만일 한반도에 미군이 주둔하지 않았으면, 중동처럼 하루도 빠짐없이 포탄이 터지고 총질이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독도 영유권 주장의 금과옥조로 생각하고 있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 발효되기 4개월 전에 평화선을 그어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세계에 알리고,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 어선을 무차별 나포하였다. 왜놈을 혼내준 인물은 충무공과 이 대통령밖에 없다.
이승만 그는 독재자였다. 그러나 민주화가 이룩된 지금의 잣대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을 기대하는 것 같다.”는 런던 타임스의 표현과 같은 당시 풍토와 식민지 잔재가 가시지 않은 인물들로 둘러싸인 상황을 고려해 봄직도 하다. 그 당시 그와 상의할 학식과 경륜을 갖춘 사람이 주변에 없는 상황에서는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할 수밖에 없고, 자연히 독재로 흐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었는지....
그를 독재자라고 하지만 4.19혁명 부상자들을 병문하면서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라고 위문하였으며.
4.19 후 4월 25일 서울 시내 교수단 데모에서 처음으로 이 대통령 하야 구호가 나오자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에서 물러나겠다.’라고 하면서 깨끗이 下野하였다.
이러한 이 대통령의 태도에 대하여 김대중 대통령은 그의 자서전에서 (이 박사) 퇴장하는 모습이 대인다웠기에 국민이 그를 다시 老애국자로 되돌려 놓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미국 측의 권유가 있어서였겠지만 순순히 권력을 내놓고 망명 길에 오른 것은 바른 선택이었다. 이 박사의 결단은 더 이상의 유혈 참사를 막았다. 시위대 대표들을 만나 불의를 보고 궐기한 의기를 칭찬한 것은 보통 사람은 지니기 힘든 용기였다. (출처 : 김대중 자서전 p.116)
대한민국 정부 수립 75주년에 다시 생각해 본다. 1948년 8월15일 이승만 대통령이 선택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오늘날 자유 평화 번영의 글로벌 중추 국가로 발돋음한 대한민국의 기반이 되지 않았을까. (조우철 명예회장 저서 <<낙산팔경>> 중에서 <이화장> 관련 부분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