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야기(1)] 
이승만은 누구인가?그는 괴물 같은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양녕대군의 16대손이었지만 빈한한 집안이었다. 11세 때 황해도 평산군에서 서울 후암동으로 이사하였고, 17세 때 동갑인 박승선과 결혼하였다. 고종황제 퇴위 음모로 한성감옥에서 5년 7개월 중죄인으로 복역하였다. 이때 옥중에서 옥바라지하는 부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은 漢詩, 미국 망명 중에 부인을 그리며 지은 漢詩는 명문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글씨 자체도 뛰어난 명필이었다. 그는 겨우 초등학교 수준을 넘은 배제학당에서 공부한 실력으로 와싱톤대(학사), 하바드대(석사), 프린스톤대(박사)를 5년 만에 마친 수재였다. 그뿐 아니라 국제회의(그는 망명 중에 일본이나 미국 국적을 취득한 바도 없고 따라서 여권도 자신이 적당히 만든 것이었다)에 참석차 제네바에 갔을 때, 식당에서 합석한 프란체스카 여사가 한눈에 반하게 만들었다. 그때 이 박사는 58세이고 나라도 없는 빈털터리 기혼 중늙은이였고, 프란체스카 여사는 33세의 돌씽인 서양미인이었다. 이 박사가 조강지처를 내쳤다고 비난하지만, 25세의 연하인 아름다운 백말이 나타났을 때 아무리 도덕이 중하다 해도 소식이 끊인 짜리뭉땅한 시골 부인만을 생각할 수 있을까. 더욱이 2, 3명의 여자는 용인되던 세상에 인간 남자로서 거절할 수 있을까. 

이승만은 1919년 약관 40세의 나이에 미국에 거주하면서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 그럴 뿐만 아니라 연해주의 노령임시정부와 한성의 임시정부도 그를 정부 수반으로 추대하여 국내외 독립단체의 통합 대통령 격이었다. 전무후무한 일이었다.그러나 그는 대통령이 되었어도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에 거주하지 않고 미국에만 있었으므로 1925년 탄핵 당하여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는데, 국무위원직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외교 활동을 하였고, 미국의 임시정부 승인을 받으려 혼신의 노력을 다했고, 그리고 미국 교민들의 헌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 이 한두 가지만 보아도 그의 천재성에 의한 수완과 능력은 범인은 따라 갈 수 없는 괴력의 사나이였다. 

그러나 국권을 회복하고 초대 대통령이 되고 난 후 과오도 많았다. 장기 집권을 위해 무력을 동원하여 발췌 개헌을 하였고, 코미디 같은 사사오입 개헌 등 정치적 파행이 심했으며,독재와 파쇼로 이회영, 김구, 김창숙, 신익희 등 독립운동 동지들과 적이 되었으며,급기야는 부패 간신배들에 휩싸여 3.15 부정선거를 저질러 4.19로 막을 내렸다. (다음 페이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