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
76기 배정석 성균관대 겸임교수
정보전의 현실과 방첩의 이해

76기 배정석 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 겸임교수가 국가정보원 월간지 [국가정보와 방첩]에 "정보전의 현실과 방첩의 이해"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이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협모든 국가는 자국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정보활동(Intelligence)을 하며 자국에 대한 다른 나라의 정보활동에 대응하기 위해 방첩활동(Counterintelligence)을 하고 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이 날로 높아져 가는 우리나라를 대상으로 한 외국의 정보활동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각국의 수많은 스파이들이 우리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며, 우리를 상대로 치열하게 정보활동을 하고 있다. 현실이 그런데도 우리의 방첩에 대한 인식은 아직도 간첩은 북한에서만 오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반공방첩’ 표어가 익숙하던 시절의 수준에 머물고 있고, 그나마 남북관계의 변화에 따라 경각심이 더욱 무뎌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는 어엿한 국제사회의 주요 국가로서 위상에 맞는 수준의 정보전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필요하다. 최근 북한에 포섭된 민간인과 군 장교가 우리 군의 핵심 정보망(II급 비밀)인 한국군합동지휘통제체계(KJCCS)를 북한 공작원이 해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장비 설치를 시도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북한 공작원과는 직접접촉 없이 인스타그램을 통해 지령을 전달 받았으며, 공작금도 4,800만원 상당의 암호화폐로 전달되었다고 한다. SNS를 활용한 비대면 HUMINT공작(사람을 활용하는 정보활동)은 비용과 시간을 줄이고 공작원(Spy)과 공작관(Handler)의 노출을 최소화하여 안전하게 공작을 추진할 수 있어 최근 각국 정보기관이 선호하고 있는 방법이다. 우리에 대한 정보적 위협은 북한 뿐 아니라 우방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로부터 오는 것이며 상시적으로 존재한다. 지난 2015년 7월에는 당시 기무사(국군안보지원사령부) 장교가 중국 연수중에 주재국 정보기관에 포섭되어 귀국한 후 2년여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27건의 군사기밀을 SD카드에 담아 중국 측에 전달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국가 정보기관에 의해 치밀하게 계획되고, 고도로 훈련된 스파이에 의해 은밀하게 수행되는 정보활동이 노출되는 것은 지극히 드문 일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실제로는 수많은 스파이들이 우리 주변에서 활동 중이라는 것을 쉽게 추정할 수 있다.우리의 국력 신장과 국제적 위상 강화는 반가운 일이나 이에 따른 외국의 우리에 대한 정보활동 강화는 피할 수 없이 수반되는 일종의 비용이며, 그만큼 커진 정보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방첩에 대한 국민적 인식 전환과 방첩역량 강화가 필요하다.
정보전의 진화와 민주주의의 위기
자국의 생존과 이익을 위한 정보활동에는 단순한 정보의 수집만이 아니라 기만, 암살, 선전선동, 사보타지 등을 포함한 다양한 수단이 동원된다. 최근에는 상대국의 정책이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추진되게 하거나, 자국에 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되도록 조작하기 위한 소위 영향력 공작(Influence Operation)이 커다란 위협으로 부각되고 있다.2016년 미국 대선에서 러시아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특정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하여 첨단 기술을 동원한 해킹과 사이버 공간을 활용한 여론 조작을 한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오바마 대통령은 러시아 외교관 35명을 추방하고 러시아 정보기관인 FSB와 GRU의 미국 내 자산을 동결하는 등 강력하게 대응 하였으며, 이후 미국 국가정보장(DNI)이 러시아 정보기관의 구체적 개입 사실을 확인한 보고서를 제출하고, 뮬러 특검의 조사를 통해서도 러시아의 개입사실이 확인되었으나 상황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2020년 미국 대선 직전에도 DNI와 FBI는 기자회견을 통해 “러시아와 이란이 미국 대선 여론에 개입하고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이러한 종류의 영향력 공작은 여론에 의한 정치를 기반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비대칭 정보전이라고 할 수 있으며, 과거의 단순한 선전선동이나 심리전과는 달리 해킹을 통한 정보의 유출과 인터넷활동 성향분석(Psychographic Profiling) 등을 통한 유권자 개인 맞춤형(Microtargeting) 선전선동술 등 첨단 기술이 동원된 심리전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해킹과 사이버공작 역량에서 러시아에 뒤지지 않고, 더욱 호전적인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나라도 절대 예외적 상황이 아니다.2022년 1월 영국 국내 정보기관인 MI5는 “중국 공산당 통일전선부와 연계된 중국계 변호사(Christine Ching Kui Lee)가 고액의 정치자금 기부를 빌미로 영국 정계에서 중국을 위한 영향력공작(Influence Operation)을 하고 있다”며 경고하였다. Lee는 영국 유력 의원들과 교류하며 고액 정치 헌금을 제공하고 「테레사 메이」, 「카메론」 총리 등과 함께 사진을 찍는 등 영국 정계에서 15년 동안 영향력을 확대해 왔으며, 영국 내 화교들에게 투표 참가를 권장하는 등 영국 내에서 중국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많은 활동을 해왔다고 한다. 이에 대해 영국 내에서는 미국의 '외국대리인등록법‘ (Foreign Agent Registration Act)과 같이 외국을 위한 이러한 종류의 활동을 사전 등록토록 의무화하기 위한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정계, 학계, 언론계 등 사회 지도층을 대상으로 하는 외국의 영향력 공작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어 이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관련 법 제도를 마련하는 등 대응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정보활동은 범죄가 아니라 전쟁
정보활동은 일반적 국가 행정 행위와는 다른 ‘특별한 국가적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특별한 국가 행위’이다. 다른 국가기관과 달리 예외적으로 정보기관에 대해서만 조직이나 활동의 비밀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민주국가에 있어서 모든 국가기관의 행위는 공개되는 것이 원칙이며, 비밀 활동을 용인할 경우 감시에서 벗어나 권한이 남용될 소지가 다분하고, 민주주의 자체를 침해할 위험성이 매우 크다. 그런데도 모든 국가들은 왜 예외 없이 이런 활동을 인정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정보기관이 군대와 마찬가지로 외부의 적대세력으로부터 국가의 생존을 지켜내는 절대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국가가 막대한 정부 예산으로 살인 무기를 구매하여 공무원(군인)들에게 인명 살상 방법을 훈련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류가 만든 가장 큰 공동체인 국가는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구성원들인 국민과 국가 스스로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서 극단적 방법도 동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외국의 정보활동에 대응하는 방첩활동은 외국 스파이가 자국의 법을 어긴 범죄자이기 때문에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의도를 파악하여 위협에 대비하고 상대의 전략을 알아내고자 하는 정보활동의 일환이며, 이를 위해서는 상대 정보기관에 대한 우리 스파이의 침투, 이중 스파이 활용, 적의 잘못된 판단을 유도하는 기만 등 고도의 공작활동이 수반되는 것이다. 요컨대 방첩활동은 평시에 이루어지는 국가들 간의 총성 없는 전쟁(Silent Warfare)으로 인식되어져야 하는 것이지 범죄의 수사나 범인의 체포와 같은 형사사법 기능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흔히 모범적인 정보기관으로 거론하는 이스라엘의 모사드가 표방하는 “기만으로 전쟁을 수행한다.” (By way of deception, thou shalt do war)는 말은 이러한 정보활동의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위협에 대한 무관심과 무기 지원 미흡
2013년 미국의 통신정보기관인 국가안전국(NSA)에서 근무하던 「에드워드 스노든」이 내부 비밀 문건을 폭로하여 국제적인 물의가 일어났었다. 2013년 1월 WTO사무총장 선거운동 기간 중 뉴질랜드 통신 정보기관 GCSB가 자국 후보 지원을 위해 인터넷 감시 프로그램 X-KEYSCORE를 활용하여 각국 경쟁자 8명의 메일을 해킹한 것도 이때 드러났는데, 2015년 4월 뉴질랜드 하원에서 이와 관련한 질문을 받은 당국자는 “브라질과는 협의하였지만 한국 정부는 개의치 않아 협의를 진행하지 않았다”고 답변하였다고 한다. 당시 우리나라 후보는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외교부 메일을 쓰고 있었다고 하니 우리 외교부의 메일 계정이 해킹되었는데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북한을 제외한 외국의 정보적 위협에는 무감각하며 그러다보니 우리 방첩기관의 외국 스파이에 대한 방첩활동에도 크게 관심이 없다. 당연히 정보전을 수행하는 방첩요원들에 필요한 무기도 남용될 수 있다며 제대로 제공되지 않고 있다. 대표적으로 스파이 활동 감시를 위한 핵심적 수단의 하나인 휴대폰 감청도 허용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단순히 기술의 진보로 유선전화가 휴대전화로 바뀌었을 뿐인데 유선전화 감청은 허용되고 휴대전화는 안 된다는 것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비현실적이다. OECD국가를 포함한 대부분 국가에서 당연히 허용되는 가장 기본적인 정보 및 수사 활동 수단인 휴대전화 통신 감청이 우리나라에서만 제한되는 것은 스스로 주권국가의 권한을 포기하고 외국 스파이들과 전쟁을 수행하는 자국 방첩요원들의 기본 무기를 박탈하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어 조속한 시정이 필요하다. 외국 스파이들이 소형화된 장비를 사용하여 우리 땅에서 우리를 상대로 휴대폰 감청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디지털 정보화 사회로의 전환과 4차산업혁명 시대의 정보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예산을 투입하여 사이버를 비롯한 첨단 과학기술 분야의 기술적 인프라를 대폭 보강하고 관련분야 전문 인력을 양성하여야 한다. 영국 정보기관 MI6의 「알렉스 영거」 국장은 이미 2016년 9월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보안 컨퍼런스에서 “정보혁명으로 업무 환경이 근본적인 변화를 하고 있으며, 5년 뒤에는 이를 알고 진화한 기관과 흐름을 놓쳐 도태되는 두 종류의 정보기관이 남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 정보기관은 어느 쪽에 속해 있는지 서둘러 진단해볼 필요가 있다.
전략적 방첩활동의 필요성
외국의 정보적 위협은 고도의 비밀성을 유지하며 은밀히 추진되는 것이기에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모든 국가들이 많은 인력과 예산을 들여 정보기관을 운용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우리가 방첩을 중요시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방첩은 상대의 정보활동을 단순하게 막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정보활동을 통해 상대국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핵심적 정보활동으로 인식되어져야 하며,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수집과 분석 및 장기적 공작수행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또한 주적이 누구인지, 구체적 위협은 어떤 것인지 등을 미리 분석, 예측하고 선택과 집중을 통한 효율적 자원 배분을 통해 최선의 방안을 만들어 내야하며, 이를 위해서 다른 모든 국가기관과의 체계적인 협조가 필요하다. 2012년 5월 제정된 ‘방첩업무규정’(대통령령)에 따라 가동되고 있는 ‘국가방첩전략회의’를 보다 실질적으로 운용하여 정부 각 부처가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국가방첩체계구축이 필요하다. 미국은 국가방첩전략을 대통령이 직접 서명해서 발표하고, 미국 내 16개 정보기관을 통할하는 DNI(국가정보장) 산하에 방첩업무를 전담하는 NCSC(국가방첩보안센터)를 두어 정보기관들 뿐 아니라 모든 정부부처가 협력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는 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방첩은 스파이를 잡아내는 단순한 활동이 아니라 국가의 외교안보 전략을 추진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인정받고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활용되어야 한다.
합법 공간의 확보와 국민신뢰 회복
많은 경우의 정보활동이 불법인 원인 중 하나는 세분화된 근거법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미국과 같이 다양한 법과 행정명령 제정 등을 통해 합법적 활동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흔히 정보요원들은 교도소의 담장 위를 걷는다고 자조한다. 합법과 불법의 회색 공간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정보요원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아무도 적극적인 업무 추진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정보활동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권한과 범위 등을 명시한 구체적이고 다양한 법률의 제정을 통해 이들에게 합법적 활동 공간을 확보해 주는 것이 정보기관을 제대로 작동하게 하는 초석이며,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데도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정보기관이 국민의 기본권과 민주적 가치를 침해할 수 있는 위험한 기관이 아니라 국가의 기본 틀인 헌법적 가치를 지켜내는 핵심적 역할을 하는 기관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일 국내 정보기관의 명칭이 연방헌법보호청(Bundesamt für Verfassungsschutz)인 것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방첩은 외국의 스파이 뿐 만 아니라 이들에게 포섭된 내국인들도 그 대상으로 하다 보니 간혹 자국민에 대한 인권침해가 문제시되기도 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의 치열한 남북 간 정보전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많은 인권 문제가 야기되었고, 이후에도 정보기관의 정치 개입으로 정보기관에 대한 국민 신뢰도가 지극히 낮아진 실정이다. 하지만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담글 수 없다는 말은 이제 그만 하여야 한다. 정보기관에 대한 과도한 부정 이미지는 국가 생존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들의 정서를 고려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지금은 국민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더 시급해 보이는 상황이다. 우리 군이 들고 있는 무시무시한 살상용 무기가 우리 국민을 향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있기에 국민이 안심하는 것처럼 정보기관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어야만 우리 정보요원들이 외국 스파이들과 정보전을 하는데 합당한 무기가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정보활동의 당위성에 대한 국민적 인식 전환을 위해서는 정치권과 언론, 학계 등 여론 주도층의 역할이 중요하며, 정보기관도 ‘절대보안’의 함정에 빠져 자신들만의 성을 너무 높이 쌓지 말고, 비밀이 아닌 범위에서 안보 이슈와 관련한 일정 부분의 정보를 국민들에게 공개하는 등 적절한 수준의 소통과 홍보를 통해 국민 신뢰를 회복하는 노력을 강화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배정석(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