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Y HISTORY]
미 해군 창설의 역사 (2)
대양해군으로 깨어나다
전쟁 속에서 존재의미를 찾다
해양에서의 자신감은 독립 후 미국에서 필수적이었는데, 유럽에 대한 수출이야말로 생명선과도 같았다. 결국 토마스 제퍼슨이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미국은 트리폴리 토후의 과도한 공납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트리폴리는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제퍼슨은 미 해군에게 대응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트리폴리 제1차 바르바리 전쟁(1801~5)으로 미국은 해군력으로 북서 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들에서 준동하는 해적들을 소탕했다. 이러한 경험은 미 해군은 물론 미국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한편 제퍼슨은 1802년 해군사관학교를 창설하기도 했다.
결국 미국은 해군력을 증강하여 토마스 제퍼슨이 대통령이 당선된 후 바르바리 해적과 전쟁에 나섰다. 제1차 바르바리전쟁으로 미 해군은 자신감을 갖고 자국의 이익을 지켜나가기 시작했다.
한편 영국이 나폴레옹 전쟁에 몰두하던 사이 미국은 영국 식민지인 토론토 등을 점령하면서 1812년 미영전쟁이 펼쳐졌다. 막강한 영국해군은 미국의 주요 항구들을 봉쇄했고, 이를 바탕으로 워싱턴 DC, 볼티모어, 메릴린드, 뉴올리언스, 루이지애나 등 주요 해안도시들을 점령했다. 그러나 미국의 호위함들은 단편적인 전투를 통하여 작은 승리들을 축적했고, 특히 레이크에리 전투에서 페리(Oliver Hazard Perry) 제독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북서부 제해권을 회복했다.
1812년 전쟁에서 미 해군은 레이크에리 전투에서 영국을 제압하고 승리의 기반을 마련했다. <출처: Murray Draper & Co.>
이후 미 해군은 정체성을 찾아가면서 조직을 점차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 의회는 예산에 엄격한 제한을 둠에 따라 함선의 크기에는 제약이 있었지만, 척수는 어느 정도 늘어남에 따라 점차 조직도 증편되기 시작했다. 우선 1812년 전쟁에서 급조된 체서피크베이 소함대(Chesapeake Bay Flotilla)나 소형포함을 모아서 활동하던 모기함대(Mosquito Fleet)가 있었지만 전후에 곧바로 사라졌다. 다만 1813년 창설되었던 뉴올리언즈전대(New Orleans Squadron)는 이후 카리브 해적들을 상대하면서 상선들을 보호했다. 1821년 태평양전대(Pacific Squadron)가 창설되어 페루의 독립을 도왔고, 미국인 소유 설탕농장이 번성하던 하와이에서 미국의 국익을 지켜냈다.
페리 함대의 일본원정은 일본에게 '쿠로후네(黒船)'에 대한 공포를 일으키면서 개항과 함께 메이지 유신의 계기를 제공했다. <출처: Public Domain>
한편 해적의 기승은 심각하여 1815년부터 1822년 사이 무려 3천여 척의 미국 상선이 카리브해에서 해적에 나포되었다. 이에 따라 1822년 서인도전대(West India Squadron)가 정식으로 창설되어 해적을 소탕하고 세미놀 전쟁으로 플로리다 원주민들을 정리했다. 1838년에는 국내전대(Home Squadron)가 창설되어 대서양의 상선보호를 담당하는 한편, 동인도전대(East India Squadron)가 창설되어 중국과의 교역에 대응했다. 동인도전대는 중국의 아편전쟁에서 미국민과 재산을 지켜냈고 1852년에는 페리(Matthew C. Perry) 제독의 원정으로 일본의 개항을 이끌어냈다. 한편 미국의 태평양 내해를 담당하는 태평양전대는 멕시코전쟁(1846~8)에서 캘리포니아를 획득하면서 임시정부의 역할까지 수행했다.
대양해군으로 깨어나다
19세기 중반이 되면서 미 해군의 군함들은 전 세계의 항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나면서 미 해군은 분열됐다. 경험많은 사관들이 남부로 넘어갔고 노포크 해군공창에서는 군함 11척과 포 2천문이 노획되었다. 그럼에도 링컨 대통령은 남부 해상봉쇄령(Union Blockade)을 발령하였고 해군은 1861년말까지 해상봉쇄에 성공하여 남부의 경제가 무너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해군은 미시시피강을 따라 남부의 주요거점을 타격하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북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남북전쟁은 세계최초로 철갑함(ironclad) 사이의 교전이 벌어지고 초기형 잠수함이 투입되는 등 미 해군의 역량을 키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남북전쟁은 철갑함(사진, 시티급 배런 데칼브함)과 잠수함 등을 등장시키면서 미해군에게 혁신의 계기를 제공했다. <출처: U.S. National Archives>
남북전쟁 직후 국내전대는 북대서양전대(North Atlantic Squadron)로 재편되었으며, 1868년 동인도전대를 대신하여 아시아전대(Asiatic Squadron)가 창설되어 중국과 일본과의 통상을 담당했고 1871년 신미양요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남북전쟁 이후 1870년대에는 남북전쟁 시기의 철갑함들이 대부분 퇴역하면서 쇠퇴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1881년 가필드 행정부에 들어와서는 상황이 심각하여 당시 헌트(William H. Hunt) 해군성 장관은 해군력 증강을 건의했다. 당시 해군함 140척 가운데 작전 가능한 함은 불과 52척으로, 17척의 철갑함은 가운데 14척은 남북전쟁 시기의 노후함이었기 때문이다.
마한은 자신의 저서 "해양력이 역사에 미친 영향 1660-1783"을 통하여 해군력의 사상적 기반을 제시했다. <출처: Public Domain>
1882년 헌트의 예산증액 요청은 기각당했지만, 같은 해 이집트전쟁이 시작되자 의회는 1883년 남북전쟁 이후 최초로 신형함 건조를 승인했다. 특히 미 해군 최초의 전함인 텍사스함과 메인함도 건조를 승인받아 1889년부터 ‘백색 전대(White Squadron, 또는 Squadron of Evolution)’라는 미래형 부대를 창설할 수 있었다. 해군력에 대한 열망은 새로운 해군사상을 낳기도 했다. 해군대학장이던 마한(Alfred Thayer Mahan) 대령은 1890년 ‘해양력이 역사에 미친 영향 1660-1783(The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 1660-1783)’이라는 저서를 통해 국력과 해군력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면서 미국에 해양강국이라는 강력한 안보의 화두를 던졌다. 드디어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벗어나 세계로 향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다.
젊고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인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해군성 차관보로 부임하면서 미 해군력 건설을 더욱 강화되었다. <출처: US National Archives>
마한의 교리는 해군성의 트레이시(Benjamin F. Tracy) 장관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그는 200척 해군의 건설계획을 제안했다. 그러나 의회가 이러한 과감한 제안을 받아들이기는 아직 일렀고, 대신 1890년 해군건설법에 의하여 전함의 추가건조를 승인했다. 특히 해군력 증강에 열정적이던 젊은 정치인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가 1897년 해군성 차관보로 부임하면서 건강이 나빴던 롱(John D. Long) 해군성 장관을 대신하여 실권을 장악했다. 특히 마한의 이론에 정통했던 루즈벨트는 최신 전함 위주로 해군력을 건설하는 한편, 맥킨리(William McKinley) 대통령이 스페인과의 전쟁을 결심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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