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해군 창설의 역사 (1)
해군력은 진정한 국제적인 무력이다



해군력은 진정한 국제적인 무력이다. 지구의 3/4이 바다로 이루어져 있고, 따라서 지상군이 기동할 수 없는 지역을 이동할 수 있다. 특히 지상군이 이동할 수 없는 지역으로 세계의 어느 곳이라도 이동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핵심적인 수로를 지키거나 해안이나 인구밀집지 근처까지 상당한 병력을 전개할 수 있다. 특히 해군력은 타국의 주권영역을 침범하지 않거나 갈등이 없이 수천 해리를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한다.해군력은 상당한 전력을 국제 공공재인 대양을 활용하여 세계로 투사할 수 있는 국제적 무력이다.
이러한 해군력은 국가에게 상당한 외교적 역량을 제공한다. 상당한 군사력을 특정한 지역에 배치하여 동맹이나 협력국가를 지원하고 안전을 보장하며, 적대적 세력의 도발행위를 막거나 위협할 수 있다. 해군력을 강압적으로 사용하는 활동을 ‘포함외교(gunboat diplomacy)’라고 부르며, 근대 제국주의 시대뿐만 아니라 현대에서도 중요한 국가적 역량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이외에도 단순히 위협뿐만 아니라 타국의 방문을 통한 친선외교나 국제적인 재난의 발생시 구호나 인도적 지원물자의 제공 등에 있어서도 해군이 발휘하는 역량은 상당하다.
일찌기 포함외교로 개항당한 일본은 운요호라는 300톤도 되지 않는 증기추진 범선으로 조선에게 강화도조약이라는 불평등조약을 강요하기도 했다.
사실 해군력이란 국가의 성장에 따라 그 성쇠가 좌우된다. 특히 해군력은 선진국형 전력이다. 역사적으로 해상로를 장악한 세력이 세계의 무역과 통상을 좌우해왔으며,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지금의 미국에 이르기까지 무역의 헤게모니를 장악해온 국가들은 응당 그에 걸맞는 해군력을 보유해왔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미중패권경쟁도 군사력의 분야에서는 해군력의 대결이 부각된다.
해적이 두려워 헌납까지 했던 미국
미 해군은 19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빈약한 연안해군에 불과했다. 미 식민지 주민들은 독립전쟁에 앞서 대륙해군(Continental Navy)부터 창설하여 최소한의 전력을 갖춰나갔다. 그러나 세계 최강의 영국해군과 맞서 싸워야 했던 죠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은 파리에 있던 벤자민 플랭클린(Benjamin Franklin)을 통하여 프랑스 해군의 도움을 요청했다. 그 결과 프랑스 함대가 1781년 9월 5일 체서피크 해전에서 영국군을 격파함으로써 영국군의 추가적 증원을 막을 수 있었고, 결국 영국 육군은 1781년 10월 19일 미 독립군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미국은 독립전쟁에 앞서 대륙해군부터 창설하여 전력을 갖췄지만 결국 프랑스 해군의 도움을 요청하여 승리할 수 있었다.

그림은 미 대륙해군함으로 1775년 12월에 취역한 알프레드함의 모습이다. <출처: U.S.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그런데 미국은 독립이 이루자마자 대륙해군을 해체하고 보유했던 선박들을 팔아버렸다. 제헌의회가 더 이상 해군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협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의원들의 생각은 틀렸다. 바르바리 해적들에 의해 미국의 상선들이 약탈당하면서 무역에 위협이 가해졌던 것이다. 의회는 1784년 곧바로 호위함 6척의 구매를 승인했고, 1798년에는 해군성(Department of Navy)의 설립을 인가했다.바르바리 해적들은 15세기말부터 19세기초까지 3백년간 북아프리카 일대를 거점으로 선박을 약탈하고 노예를 잡는 등 악행으로 악명을 떨쳤다. <출처: Heritage History>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한심스러웠던 것이었냐 하면 미국의 상선들은 바르바리 해적들의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독립 이전 영국 상선의 깃발을 달았을 때는 해적들이 감히 건드리지 못했지만, 독립 이후 더 이상 보호해줄 강력한 해군이 없었던 미국 상선들은 가장 인기 높은 나포의 대상이었다. 외교관 자격으로 파리에 있던 토마스 제퍼슨은 나포된 선박과 선원들을 석방하기 위해 여러 국가들과 접촉했는데, 스페인 정부가 협상을 도와주면서 제시한 해결책은 남달랐다. 나포를 막으려면 조공을 제공하라는 것이었다.미국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기도 했던 미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토마스 제퍼슨은 나포된 자국 선원 석방을 위하여 만방으로 뛰어다니다가 결국 석방금을 통한 해결을 채택했는데, 결국 조공외교라는 굴욕적인 결과를 낳았다.
<출처: Public Domain>
결국 제퍼슨은 모로코와 알제리에 조약을 제안했지만, 이는 지켜지지 않거나 혹은 엄청난 비용의 요구가 뒤따랐다. 특히 알제리에 10년이나 억류되었던 미국 선원 115명의 석방에는 무려 1백만 불이 소요되었는데, 이는 1795년 당시 미 정부예산의 1/6에 해당하는 말도 엄청난 금액이었다. 이런 사건들이야말로 미국이 해군력을 다시 추구하게 된 강력한 계기가 되었다. 물론 해군력이 생겨났지만, 양성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후에도 미국은 상선의 안전통행과 인질석방을 위해 매년 1백만 불을 계속 지급했는데, 이는 당시 기준으로 미 정부 지출의 10%에 해당하는 기준으로 알려진다.(다음 페이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