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Y HISTORY]
해군 창설일에 새겨진 신사도 정신
김재화 해사교수부 철학교수
1945년 11월 11일, 서울의 한 작은 건물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모체 해방병단(海防兵團)의 창단 기념식이 조촐하게 거행됐다. 미 군정청 해사국장이 공식 참석한 가운데, 단장 손원일 이하 70여 명의 지사들이 해방된 조국의 바다를 지키기 위해 모였다.당시의 단장이자 훗날 초대 해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등을 역임한 손원일 제독은 그날의 현장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그날의 창단 기념식은 성대하고 화려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식량도 귀한 판에 유니폼은 생각할 수도 없어 각양각색의 복장과 신발을 착용했고, 총도 몇 자루 없었다. 그러나 해군 건설의 첫발을 내딛는 감격은 대단했다.”이 내용으로 미뤄 보건대, 해군 창설 당시의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식량과 제복, 무기 등 그 어떤 것도 제대로 갖춰진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손원일 제독은 그러한 열악한 상황에서 해군을 창설하면서도 훗날 실현될 선진해군의 모습을 꿈꾸고 있었다.
“창단일이 11월 11일로 결정된 데는 숨겨진 이유가 있다. [중략] 士月士日로 보인다. [중략] 해군은 젠틀맨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사도에 의해 운영돼야 한다.”이처럼 손원일 제독은 해군의 창설일을 결정함에 있어 평소의 소신에 따라 의도적으로 어휘 신사(紳士)의 사(士)자를 새겨넣음으로써, 조국의 해군이 미래에는 신사도 정신에 의해 운영되기를 간절히 염원한 것이다.
신사도 정신(Gentlemanship)의 가치체계는 크게 보아 도덕적 명예와 정의로움, 품격 높은 의상과 언어, 그리고 예절과 교양으로 이뤄져 있다. 신사는 언제나 정직하고 정의롭게 행동함으로써 도덕적으로 떳떳하고 명예로운 존재여야 한다. 신사는 격식에 따른 의상을 갖춰 입어야 하며, 신사의 언어는 언제나 품격이 높고 격식을 갖춰야 한다. 이상적인 신사는 모두가 동등하게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평등한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신사에게 학식보다 더 중시되는 것은 바로 ‘교양’이다. 그것은 품격 높은 몸가짐과 언어, 남의 심경을 헤아려 일상에서 수시로 처하는 미묘한 상황에서도 남의 감정을 해치지 않고 적절히 처신할 줄 아는 체득화된 판단력 등에서 드러나는 것으로서, 곧 소양과 인격과 판단력의 종합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손원일 제독은 청년기 해외에서 직접 목격한 선진국 해군에게서 풍기는 이 신사도 정신에 주목하고, 신사도 정신의 일반적 가치들에 더해 최첨단 무기체계를 운용하는 해군에 특별히 요구되는 ‘기술과 학식’이라는 두 자질을 포함한, 더 차원 높은 정신적 덕목 ‘기품’을 바람직한 해군의 신사도로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선진해군으로 도약하고 있는 해군은 외면과 내면의 동반 성장을 이뤄 국민에게 신뢰받는 진정한 선진해군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의 열쇠로 해군 창설일에 새겨진 신사도 정신에 기반해 미래의 선진해군상을 정립하는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으며, 그 해군상은 손원일 제독이 간절히 바랐던 ‘기품 있는 신사 해군’으로 정립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김재화 소령, 해사교수부 철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