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y story]

알려지지 않은 1차 연평해전 실화

1999년 6월14일 UDT활약상 증언

  1999년 6월 14일 토요일 정오, 일과종료 전 평화롭던 부대에 갑작스런 영내 대기령이 발령됐다. 꽃게잡이 철을 맞아 연평도 근해에서 자주 월남을 감행하던 북한군 함정의 이상 징후로 인해 그날 오후 늦게 56특전전대의 가용병력 1개 대대급(10개팀, 파견당시 당시 UDT 1개팀은 4명)의 편성과 더불어 실탄과 중화기를 포함한 병기와 장비들이 지급되었다. 필자를 포함한 특전대원들은 완전군장을 착용한 채 뜬눈으로 그날 밤을 지새우고 다음날인 15일, 일요일 새벽 4시, 버스로 인천 2함대 사령부에 도착 후, 다시 해군 상륙함정을 이용하여 연평도 부근에 정박 중이던 임시 고속정 모함 LST로 이동했다. 최초교전은 15일 오전에 이미 발생했지만 북한해군과 근접 교전시 취약한 고속정의 화력보강을 위해 중화기로 무장한 UDT 1개 팀씩 탑승하여 무력시위를 함으로써 북한군의 추가도발을 성공적으로 억제 하였다. 당시에는 우리 UDT의 존재가 지금의 청해부대 활약상처럼 공공연하게 언론보도 되는 것이 금기시 되었던 관계로 우리는 모두 고속정 단복으로 소속을 감춘 채 각자의 임무에 충실했고 고속정 탑승팀을 제외한 예비소대의 인력 중 지휘부인 대대장님과 주임원사 만을 제외한 채 작전관인 필자 이하 모두 1명의 열외 없이 자동소총과 수류탄을 지닌 채 주야간으로 고속정 모함 방어에 투입되었다. 이후로도 북한군의 산발적인 추가 도발이 행하여 졌지만 커다란 손실 없이 최초 교전 발발 40여일 만에 우리대대는 무사히 모두 부대로 복귀 할 수 있었다. 전역 후 1차 연평해전을 전투로 인정하지 않고 우리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정부의 의도로 인해 참전(유공)자로 인정을 받지는 못했지만 필자가 북괴와의 최전장에서 나라를 지켰다는 건 아무도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고 나라를 위해 젊음을 불태웠던 기억은 죽을 때까지 우리 해군전우들과 함께 하리라.

대한민국 해군 56특전전대 62중대장

OCS 92차 예비역 해군중위 최해욱